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이브러햄 링컨 (문단 편집) == 링컨과 기독교 == 이 문단에서 링컨이 기독교도였나 아니었나 하는 것은 링컨이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모습을 보였느냐 아니었느냐란 의미다. 당대 미국 사회의 사람이었다면 그 자신이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기독교적 가치관과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기 때문이다.[* 당장 유교세가 많이 약해진지 수십년이 지난 현대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교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한국인은 적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언행 이라면 진작에 링컨은 반기독교적이었다는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공식석상에서의 링컨의 언행을 보면 기독교인이라 봐도 괜찮은 수준으로 보이긴 한다. 실제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면서 링컨은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국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시리라 믿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이외에도 [[http://www.abrahamlincolnonline.org/lincoln/speeches/handbill.htm|1846년 연설문]] 같은 것도 있다.실제로 링컨은 연방 수도를 [[워싱턴 D.C.]]로 옮긴뒤 항상 백악관에서 인접한 [[https://en.wikipedia.org/wiki/St._John%27s_Episcopal_Church,_Lafayette_Square|라파예트 광장의 세인트 존 교회]]에서 대통령 취임식 예배를 하고 성경에 선서하는 의식을 최초로 거부하고 자신이 다니던 일리노이주의 First Presbyterian church의 예배에 참여했지만,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상술한 세인트 존 교회에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저녁 예배에 참여하는 등, 인생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기독교 신앙이 점점 강해졌다는 것이다.[* 재임 중에 전쟁에서 싸우다가 크게 다쳐 죽음이 가까워지는 청년이 어머니께 쓰려는 편지를 대신해 쓰고 난 뒤에 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함께하며 그 옆에서 성경책을 펴고 여호수아 1장 9절을 읽었다는 일화가 있다.] 남북전쟁 중에는 어느 기도집회에서 신도들이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우리가 이기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듣고는 "하나님이 북군 편에 서실 것이 아니라 북군이 하나님 편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기독교에 대한 링컨의 시니컬적인 면모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애초에 성경에서 예수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였단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의 의지보다 우선시한다. 즉 이 발언은 말 그대로 북군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선한 군대가 되도록 해달라고 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것이 당시 발언 상황상으로도 올바른 해석이다. 링컨이 성경과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링컨은 신이 인류를 향해 가진 계획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신론적 생각은 있었지만 성경과 기존 신학을 배제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링컨과 개인신앙(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링컨은 기독교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링컨과 교회의 기존 교리(혹은 교리로 보이는 분위기)로 봤을 때 링컨은 이신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말년에는 특히, 가장 사랑하던 아들 '윌리'가 장티푸스에 걸리자 아들의 침대 옆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곤 했고, 윌리를 잃은 후에는 기독교 신앙(예수를 구세주라고 언급하면서)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며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한 적도 있다. 아내인 메리는 링컨은 전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교적인 인물이었다고 표현하였으나 아들 윌리가 죽은 이후부터는 그가 기독교적 믿음에 의지하여 신에게 자기자신을 모두 바쳤다고 했다고 한다, 즉 아들의 죽음 이후 신에 귀의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 알렌 C. 구엘조는 링컨의 신앙을 '[[칼뱅]]화된 이신론'이라고 불렀다. 그 1999년 저술하고 출판한 <링컨:구원자 대통령> (Lincoln: Redeemer President)에서는 그의 유소년기에 접했던 칼빈주의 사상과 뿌리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이 구엘조의 칼뱅화된 이신론(Calvinized Deism)이란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신의 창조 후 인간역사에 무개입하는 그 이신론을 뜻한 것이 아니다. 칼뱅의 대표적 신학사상인 그리스도의 구원론과 예정론은 창조 후 신의 무개입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인데 이러한 모순적인 뜻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구엘조의 칼빈주의적 이신론이란 건강한 정교분리를 갈망하고 당시 혼란스런 종교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링컨의 내면을 대변하고자 사용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구엘조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아래 국가 인문 위원회 National Council in Humanities 위원으로 임명되었었다). 링컨의 신앙관에 관해 언급하는 저명한 연구서적으로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미국사 교수인 리처드 커워딘(Richard Cawardine)이 집필한 <링컨: 목적과 권력의 삶>(Lincoln: Life of Purpose and Power)인데 이곳에서 커워딘은 링컨의 북부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을 그들이 신의 택함 받은 사람들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조성하고 키워 미합중국의 깃발 아래 결집시킨 그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2006년 2월 19일자 뉴욕타임즈의 커워딘 교수의 책에 대한 기사에서는 이에 대해 "이러한 특출난 재능이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로 의심되었던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종교적 회의론자인 동시에 연방의 유지와 노예해방을 어떠한 높고 신비한 목적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링컨의 내면을 묘사했다. [[http://query.nytimes.com/gst/fullpage.html?res=9E03EEDC153EF93AA25751C0A9609C8B63&n=Top/Features/Books/Book%20Reviews&pagewanted=2&pagewanted=all|해당 NYT 기사]] 중립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는 '''어느 특정 교단의 멤버가 아니었으며,[* 대통령 취임 전에는 장로교, 성결교도 다녔고, 취임 후에는 침례회에 출석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침례회 신자로 분류된다.]''' 만인평등 정신에 위배되는 노예제도에 찬성하거나 침묵했던 당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자였지만 어릴 적부터 칼빈주의적 사상에 깊게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개신교인'이라는 것이 다수 현대 역사가들의 결론이다.[* 위키피디아의 Abraham Lincoln and Religion 문서로.] 하지만, 그것은 곧 역대 대통령들의 기독교 종파 주류이자 미국 주류계층의 종파인 미국장로교,연합감리교,성공회가 아니었고, 신앙관도 미국의 전형적인 복음주의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기준으로 신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이 맞는가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